1930년대 운동

1930년대에는 문화통치가 끝나고, 민족말살통치가 시작돼.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독립운동 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탄압이 극에 달하여 도저히 뭘 할 수가 없는 거야.
따라서 국내에서는 민족문화수호운동 정도만 했고, 제대로 빠이팅한 활동은 국외로 이전하여 전개하지.
민족문화수호운동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1930년대에서는 국외 운동을 말해줄게.

I. 1930년대 초반
1. 한중연합작전
자~ 1930년대 무장독립투쟁!
1930년대는 한중연합작전! 이렇게 외치고 시작하자.
한중연합작전! 한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함께 일본에게 맞서 싸우는 시기야.
1930년대 초에는 만주에서 활발히 무장투쟁을 전개해.

미쓰야협정과 만보산사건(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의 충돌사건)으로 조선과 중국 사이에 마찰이 있었는데,
일본 놈들이 만주사변(일본 놈들이 자원과 군수물자 공급처로 사용하기 위해 만주를 점령함)을 일으키면서 중국쌔끼들이 이제서야 각성을 한 거지ㅡㅡ
'아... 우리의 적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구나...'
이렇게 되면서 조선과 중국은 손을 잡고 일본에 무장투쟁을 한단다.
솔직히 우리는 '개꼬시다ㅋㅋㅋㅋㅋ' 이러면서 두고 보면 참 좋았을텐데, 우리도 일본한테 쳐맞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라 밉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아야지 뭐...

저번 시간에 말한 대로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어.
북만주의 혁신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
아래 지도와 같이 혁신의회의 부대인 한국독립군은 지청천(이청천)의 통솔 아래 중국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대전자령·사도하자 전투를 치러.<★>
국민부의 부대인 조선혁명군은 양세봉의 지휘하에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흥경성 전투를 치르지!<★>

예전엔 이거 아주 무시무시하게 기출됐어.
요즘엔 뜸한데, 거의 매년 출제되던 부분임.
나올 수도 있으니... 반드시 암기!!

이렇게 연합을 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일본한테 밀려서 만주 쪽을 내어주게 돼.
그래서 결국 30년대 중반부터는 독립운동세력이 중국관내로 이동을 하게 된단다.
하지만 만주에서 군사저항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야.
조선광복회가 30년대 후반까지 동북항일연군을 이끌며 보천보 전투 등을 치르며 일제에 저항하지.

● 만주사변

● 한중 연합작전
(1) 혁신의회. 한국독립군. 지청천. 중국호로군. 쌍성보·대전자령·사도하자
(2) 국민부. 조선혁명군. 양세봉. 중국의용군. 영릉가·흥경성

2. 임시정부
저번 시간에 1920년대에 유일당운동이 좌절됐다고 했지?
그 후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어.
연통제와 교통부가 파괴됐고, 국민대표회의도 무산됐으며, 유일당 운동도 좌절됐잖아.
활동내역이 시원찮았다고...
그러니 처음과 달리 외국과 국민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내려가고 결국 돈줄이 끊겨...
독립운동 잘하라고 돈 대줬는데, 지들끼리 싸움만 하고 있으니 누가 투자하겠어.
운영비가 없으면 단체는 망하는 거지...
얼마나 어려운 시기냐면,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가 훗날 회상하길 이때 당시에 먹을 게 없어서 쓰레기통에서 배춧잎을 주워 먹었대 ㅠㅠ
김구는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해.
'운영비를 확보하고 조직을 키울 투자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유레카!!!'
그는 고민 끝에 의열투쟁을 결심한단다.
아무래도 주요 인물 죽이면 광고 효과 쩔겠지?
따라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의열투쟁을 시작해.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엄청 험악해져.
이런 상황에서 1932년 1월에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열사가 일왕(일본 왕)을 향해 폭탄을 던져.<★>
근데 위력이 약해서 일왕을 못 죽였단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는데, 중국의 신문들이 이봉창 의거에 대하여 그가 던진 폭탄이 '불행히도' 일왕에게 명중하지 못했다고 기사를 내ㅋㅋ
일본 입장에서는 열 받는 일이지 ㅋㅋ
빡친 일본은 곧바로 상해를 침공하여 도시를 방화하고 시민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러.
그리고 난 후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는데!!

일본의 공격에 중국이 아무것도 못하고 부들부들하고 있을 때, 그해 4월 그 유명한 윤봉길 열사가 일본이 상해침공 승전 축하 행사를 여는 홍구(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해지구 사령관 · 상해민단 위원장을 죽이고, 공사와 중장 등 고위관료들에게 중상을 입힌 거야.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휘밤 엄청난 감동이지ㅋㅋㅋ

이리하여 중국으로부터 거금의 투자금이 팍팍 들어오기 시작해.
어느 정도였냐면 중국의 유명인사들의 면회신청이 끊이지 않았고, 게다가 3만여 달러를 지원해준단다.
지금의 3만 달러는 우습겠지만, 이때 당시의 가치로 따지면 엄청난 액수야.
이제 군대 양성도 쌉가능.
김구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거지.
학생들은 '저 검정 뿔테 안경 쓴 할아버지 왜 자꾸 역사책에 나오는거야?' 라며 궁금했지?
바로 이 사건 때문에 김구는 조선 독립운동 최고의 네임드가 된단다.
근데 문제가 생겨.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겠어?
분노 게이지 아주 풀로 차서 김구를 조지려고 하지 않겠어?
김구 목에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을 거는 등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해.
따라서 임시정부는 결국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
이렇게 임시정부의 상해시대는 끝나고, 이리 저리 근거지를 옮겨 다니는 이동시대가 도래한단다.

● 한인애국단 - 이봉창(일왕 폭탄). 윤봉길(홍커우 폭탄).

II. 1930년대 중·후반
1930년 중후반을 보자!
임시정부는 이동 시대에 그닥 큰 활동을 펼치지 못해.
한자리에 말뚝박지 못하고, 계속 이동 했다는 것 자체가 일제 감시가 엄청 심하다는 얘기잖아.
휘바 일왕한테 폭탄 던졌는데 가만히 놔둘리가 없지ㅋㅋㅋ
뭐 하려고 하면 발각되고, 간부진들 체포되고 눈에 불을 키고 조지려고 작정했어.
따라서 임시정부는 계속 일본을 피해서 중국 깊숙한 곳으로 이동 또 이동을 해.

이렇게 임시정부가 도망다니며 위축되고 있을 때, 여러 독립군 단체 중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주가가 올라.
의열단은 민족유일당운동을 펼치며 여러 독립단체들을 연합하여 민족혁명당을 만든단다.
근데 민족혁명당은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돼.
아무래도 일본이 임시정부만 조지려고 한 게 아니었겠지.
일제의 압박도 심했고, 이 당시에는 사상 대립도 살벌해서 하나로 뭉치기가 참으로 어려웠어.
의열단은 사회주의 색이 매우 강한 단체였는데, 임시정부도 사회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던 터라 애초에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고, 중간에 민족주의계열 사람들이 탈당을 하고, 또 휘바 서로 싸워ㅋㅋ
그래도 의열단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회주의단체들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 무장조직으로 화북지대에서 다음 해인 1938년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한단다.

많이 복잡하지?
정리해서 그냥 이렇게만 알아둬.
1930년 중후반에는 임시정부는 도망다니기 바빴고,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이 민족유일당 운동을 펼치며 뭔가 큰 일을 해내려 했지만 사상 대립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함.
하지만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음.
그리고 1940년대가 도래하는데...

● 의열단. 김원봉. 민족유일당운동.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2023년 수능기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인물은?
이봉창이지.
한인애국단 소속이야.

1번 : 미친ㅋㅋ 예송을 왜 전개해ㅋㅋㅋ
2번 : 한성순보는 박문국.
3번 : 이것은 독립협회.
4번 : 윤봉길이 단원으로 활동. 정답!
5번 : 북학파;

정답 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