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국외 운동

I. 해외 무장독립전쟁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연해주 쪽에 독립군 부대가 다수 결성돼.
서간도에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복군사령부(총영)....
북간도에는 대한국민회군,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등이 편성됐단다.
연해주에는 대한광복군이 탄생하긴 했으나 러시아가 한인들 무장활동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만주 쪽에 비해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어.
국내에도 천마산대, 구월산대, 보합단 등 항일무장투쟁이 있긴 했지만, 만주와 연해주 중심으로 무장독립투쟁이 전개됐지.

II. 의열단
우선 의열단을 보자.
이게 뭐하는 단체냐면 말이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하여 민족 반역자 처단 및 식민 통치 기관 파괴 활동을 하는 단체야.
의열단이 큰 성과를 보이기는 했지만 너무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일어나자, 1923년에 신채호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이 담긴 조선혁명선언(2천만 민중은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가자는 내용)을 하면서 조선인들에게 독립의 확신과 목표를 불어넣었어.<★>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활약, 그리고 시기를 잘 알아둬.

박재혁 - 부산경찰서 폭파(1920)
김익상 - 조선총독부 폭파(1921)<★★>
김상옥 -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여 일본 경찰 십수 명을 사상케하고, 종로경찰서 폭파(1923)<★>
나석주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1926)<★>

이처럼 큰 활약을 한 의열단은 훗날 1932년 10월에 와서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군관을 양성해.
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하면서 무장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

● 1919년. 만주 길림. 김원봉. 신채호(조선혁명선언). 박재혁(부산경찰서폭파,1920). 김익상(조선총독부폭파,1921). 김상옥(종로경찰서폭파,1923).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 폭탄 투척,1926). 조선혁명간부학교(1932)

III. 봉오동전투(1920)
만주에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어 모양새를 갖추자 독립군들은 무장항쟁을 활발히 펼쳐.
만주에서 조선으로 넘어와서 일본의 행정기관을 공격하는 등 아주 괴롭혀ㅋ
1920년에 일본은 이를 뿌리 뽑고자 제 19사단 월강추격대대를 보내서 북간도 독립군 기지를 공격한단다.
머릿수가 딸린 우리 독립군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오자 사격을 가하지.

숫자만 많으면 뭐해... 갑자기 위에서 총알이 마구 날라 오는데 당황해서 싸울 수나 있겠어.
일본군이 두들겨맞다가 정신을 차려서 반격을 하자 우리 독립군은 도망가 ㅋ
일본 놈들은 걍 여기서 '하... 젠장' 하면서 돌아갔어야 돼.
근데 분노게이지가 꽉 찬 일본군은 이미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끝까지 쫓아와 ㅋ

결국 일본군은 봉오동 까지 들어왔는데...
이게 사실 홍범도 장군의 유인책이었어.
홍범도장군이 이끌고 있는 대한독립군과 기타 세력은 이미 매복하여 있었고...
일본군이 깊숙이 들어오자 무자비하게 사살했지ㅋ
결국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내며 참패를 당해.

독립군 측은 4명의 전사자, 그리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뿐 ㅋ
이것이 1920년의 봉오동 전투<★★>야.


● 만주 독립군의 활약 → 일본군의 북간도 공격 → 봉오동 유인책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기타)의 일본군 사살

IV.훈춘사건(1920)
봉오동에서 쓴 맛을 본 일본은 '이거 얕봐선 안 되겠구나... 제대로 한번 붙어야지...' 하면서 대군을 파병할 계획을 세워.
근데 문제는 만주가 중국 땅이라는 거야.
국경을 넘어 군대를 파병하는 게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라는 거지.
수백 명 정도야 보낼 수 있지만, 대군을 보내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지기 때문이야.

그래도 일본 입장에서는 독립군을 그냥 내비 둘 수는 없잖아?
이 야비한 놈들은 꾀를 내.
바로 중국의 마적단을 매수하여 일본영사관과 일본인 민가를 공격하게 한 거야.
이를 훈춘사건이라고 해.

훈춘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게 막대한 피해 보상을 청구했고, 제대로 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만주에 대군을 파병하겠다고 위협하지.
중국이 미처 대답을 미루고 있을 때, 일본은 걍 빠르게 대군을 투입한단다.
엄청난 숫자의 일본군이 몰려오자 독립군은 이를 피해서 백두산 일대로 이동을 해.

● 대군파병계획 → 일본의 중국과 외교마찰우려 → 마적단 매수하여 일본영사관 및 민가 공격토록 함(훈춘사건) → 보상청구 → 중국이 망설일때 그냥 대군 투입

V. 청산리전투(1920)
독립군은 백두산으로 이동을 해서 당장은 일본군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에서의 참패를 복수하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고, 결국 결전을 치러야하는 상황이 와.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다는 거지.
독립군은 청산리에서 집결하고,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홍범도의 대한독립군+알파세력은 전투를 준비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가 치뤄진단다.

싸움은 청산리 백운평에서 시작됐어.
매복하고 있다가 좁은 계곡을 지나는 일본군을 대량으로 사살ㅋㅋ
독립군 2500명으로 일본군 5만 명을 물리친 거야!
이정도면 김좌진이 신컨(신의 컨트롤)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음.
여기서 일본군은 부상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무려 3300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을 정도로 녹아내렸지ㅋ

백운평 전투 후에 이어지는 갑산촌, 어랑촌 등의 10차례 전투에서 지형을 이용한 뛰어난 매복작전과 주민들의 도움으로 모두 승리하여 일본군을 아주 개박살을 냈단다.


● 일본군이 포위망 좁혀옴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은 청산리 백운평을 시작으로 전투 개시 → 갑산촌, 어랑촌 등 10여 차례 전투에서 일본군 사살

VI. 간도참변(1920)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는 바로 주민들이 협조해줬다는것.

이 사실을 일본 놈들이 알게 됐고...
빡친 일본 놈들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한인들을 대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거야 ㅠㅠ
만주 전역에 보복작전이 펼쳐지자 각처에 있던 독립군들은 밀산부로 퇴각했고, 다른 독립군단체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1920).

대한독립군단은 밀산부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어.
그들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러시아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한단다.

● 청산리전투에서 주민들이 협조를 한 이유로 일본군이 그들을 학살(간도참변) → 독립군 밀산부로 퇴각 → 대한독립군단 조직 → 자유시로 이동

VII. 자유시참변(1921)
자유시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은 비극적인 사건을 맞아.
바로 자유시참변...<★★★>
일본은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로 이동한 것을 듣고 러시아에게 경고를 해.

일본 : 야. 불곰국. 너네 청산리전투 들었지? 우리 지금 복수해야 하거든. 걔네 감싸주면 우리 일본한테 선전포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러시아 : 워...릴렉스.... 알았다.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

러시아는 일본이 복수심에 불타올라 무지막지하게 나오자 독립군 때문에 괜히 일본군이 국경 넘어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여 대한독립군단에게 무장해제 명령을 내려.
뭐?!?! 무장해제?!?!?!
피와 땀을 흘려 벌어들인 귀중한 자금으로 획득한 무기들인데... 어떻게 이걸 포기해...
무장해제하면 항일투쟁은 좌절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독립군은 저항을 해.
결국 러시아군은 독립군에게 공격을 퍼부었고, 독립군의 대다수가 사망하고 체포되는 등의 큰 타격을 받아 ㅠㅠ

당시에 독립군들은 죄다 자유시로 몰려왔는데 이런 학살을 당했으니 그 피해는 무지막지했지...
암튼 간도참변으로부터 피해 온 독립군들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비극을 겪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잔여세력은 다시 만주로 내려온단다.


● 일본군이 러시아에게 독립군 학살 요구 → 러시아의 무장해제 명령 → 독립군의 저항 → 러시아의 독립군 학살 → 살아남은 독립군 뿔뿔이 흩어짐

VIII. 3부 결성 및 통합운동

자유시에서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만주로 돌아와서 3부를 결성해.
참의부(1923)! 정의부(24)! 신민부(25)!
3부는 자치정부성격을 갖고 있었어.
한인 사회에서 임원 선출하여 행정·입법·사법부를 구성하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었으며, 교민보호와 독립군 양성에 힘을 썼단다.

자유시참변까지 일으킨 일본이 독립군이 탄생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지...
이 3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색출하기 위해 일본은 중국과 협정을 맺어.
바로 미쓰야 협정(1925)이야.
중국인들한테 독립군을 잡아오면 현상금을 준다는 내용이란다ㅡ.ㅡ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서 중국으로 갔는데, 이제는 중국과 일본이 한통속이 됐어 ㅠ

이를 극복하기 위해 3부 통합 운동을 전개해.
따로따로 놀지 말고 하나로 뭉쳐서 이 고난을 타개하자는 거지!
그 결과 하나로 뭉치는 것은 실패했지만 2개로 통합이 돼ㅋ
1928년 북만주에서는 신민부 군정파가 중심이 된 혁신의회!
1929년 남만주에서는 정의부 주력파가 중심이 된 국민부!

혁신의회와 국민부는 후에 각각 한국독립당(군)과 조선혁명당(군)으로 연결되어 1930년대 초반의 독립전쟁의 주인공이 된단다.

여기까지가 20년대 무장독립전쟁이야.
봉오동전투 → 훈춘사건 →청산리전투 → 간도참변 → 대한독립군단 → 자유시참변 → 3부 결성 → 미쓰야협정 → 3부 통합운동 → 혁신의회, 국민부
이 흐름을 반드시 기억 하렴!

● 3부 결성.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미쓰야협정(독립군 포획하면 포상금). 3부 통합운동. 혁신의회(북만주,한국독립당). 국민부(남만주,조선혁명당).
● 봉오동전투 → 훈춘사건 →청산리전투 → 간도참변 → 대한독립군단 → 자유시참변 → 3부 결성 → 미쓰야협정 → 3부 통합운동 → 혁신의회,국민부

IX. 임시정부(상해시대)
1. 수립 초기(1919~1921)
(1) 임시정부의 구성
임시정부는 삼권분립원칙에 따라 국무원(행정), 임시의정원(입법), 법원(사법)을 둬.
국무원 밑에는 8부를 두었고, 의정원은 출신지역별로 선임된 위원으로 조직됐지.
중요한 것은 민단, 연통제, 교통국!

민단이 뭐냐면 말 그대로 민간단체야.
하지만 이 시기의 미주, 상하이 등의 곳곳의 민단은 단순한 단체가 아닌 지방행정조직으로서 호구조사, 학교 운영, 민단세 징수 등 행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들이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이 되어 관리 감독을 받게 돼.
연통제는 통신업무, 자금의 수합 등 국내 행정을 장악하고자 만든 기관이야.<★>
서울에 총판을 두고, 도에 독판을, 군과 부에는 군감과 부장, 면에는 면장을 두어 체계적으로 관리를 했단다.
민단이 국외 행정조직이었다면, 연통제는 국내 행정조직이지.

교통국은 각 지방 연락을 책임지는 조직망이야.<★> 국내외의 정보를 확보하는 통신기관!
이렇게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행정을 장악해서 잘 꾸려나가나 싶었지만 교통국과 연통국이 1920년 말에 일본에게 발각되어 1922년에 모두 파괴돼ㅠ

(2) 외교활동
임시정부 초기에는 외교활동에 주력했어.
대표적인 활동을 살펴보자.
1)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프랑스 파리위원부에 파견을 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2)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구미위원부(이승만)<★>,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서재필)는 국제연맹 및 국제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

3) 소련을 상대로 1922년에는 이동휘와 김규식 등이 모스크바의 극동 인민 대표 대회에 참석해서 레닌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받음.
4) 스위스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킴.

(3) 무장투쟁
임시정부가 외교활동에 주력했다는 거지 오로지 외교만을 한 것은 아니야.
물론 당연히 무장투쟁활동에도 관여했지.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한 정부가 남의 나라에서 직접 군대를 양성하지는 못했지만,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산하조직으로 두는 등 나름 활발히 진행했단다.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으로는 대표적으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있어.
이렇게 산하기관으로 군대를 두긴 했지만, 상해시대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은 훗날 생기는 한국광복군과는 달리 말 그대로 지원 정도이지 전략에 개입하지는 않았단다.

(4) 기타
임시정부는 위의 활동 뿐만 아니라 사료편찬소를 두어 한일관계 사료집을 편찬하고, 또한 독립신문을 발행했어.(독립협회 것과 혼동ㄴㄴ)<★>

2. 국민대표회의기(1922~1924)
수립기에 잘나갔던 임시정부는 점점 추락을 해.
일본놈들의 압박으로 연통제와 교통부가 파괴되었고, 만주의 독립군들이 자유시참변을 당하였으며, 베르사유체제로 인하여 외교활동이 위축되었단다.
이로 인하여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독립운동 노선에 대해 갈등이 생기지.
하지만 임시정부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뭉쳐서 독립운동을 하자며 각 단체의 대표들을 소집해.
이것이 바로 1923년 1월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야.<★>
세계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 200여 명이 모인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이 회의는 독립운동의 방향과 정책을 수립해 나가면서 5개월에 걸쳐 63회나 열렸단다.
이대로 깔끔하게 하나로 뭉쳐서 일제에 대항을 했다면 참 좋았으련만...

회의 진행 중에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서로 싸워 ㅠㅠ<★>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주장을 했고, 개조파는 괜히 해산시켜 명맥을 끊지 말고 잘못된 점만 고치자는 주장을 하지.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개조파가 회의를 거부하면서 5월 15일을 끝으로 회의는 결렬이 되고 말아 ㅠ<★>
이에 실망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가고, 안타깝게도 임시정부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을 기회를 놓친단다...

3. 유일당운동기(1925~1929)
여기에 질세라...
임시정부는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개편을 해.
1919년 2월에 이승만의 국제연맹청원사건(국제 연맹에 일본 대신 미국에게 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함;)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게 알려지면서 그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어.

그리고 솔직히 이승만은 상하이가 아닌 미국에 거주하면서 임시정부를 제대로 이끌지도 못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탄핵이 돼.
그리고 임시정부는 1925년 4월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2차 개헌(헌법을 고침)을 했단다.

3·1운동 후에 독립운동에 방해가 된 요소가 등장하는데... 바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야.
합심하여 싸우기도 부족한 상황에 사상으로 인하여 독립운동노선이 갈라져버린 거지;
이를 극복하고자 2차 개헌으로 새로 단장한 임시정부는 유일당 운동을 실시해.
민족주의 대표로 안창호가 나섰고, 북경의 좌파세력의 거물 원세훈이 만나서 협상이 이루어져.
이렇게 유일당운동의 결과로 좌우세력이 하나로 뭉친 임시정부는 잘나가 싶었는데, 1927년에 또 차질이 생겨 ㅠ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제1차 국공합작이 무너지고, 1928년에는 코민테른(레닌이 이끈 공산주의 사령부격인 국제노동자 조직)이 민족주의세력과 결별하라고 지시하면서 좌파세력은 떨어져나가 지들끼리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해.
이렇게 하여 유일당운동은 좌절된단다...

● 수립초기(19~21) : 민단. 연통제. 교통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국제연맹 및 국제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 무관학교 설립. 만주 독립군단체들을 산하에 둠(지원정도에 그침). 한일관계사료집과 독립신문 발행.
● 국민대표회의기(22~24) : 국민대표회의. 창조파·개조파. 회의 결렬.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남.
● 유일당운동기(25~29) : 국제연맹청원사건으로 이승만 탄핵. 유일당운동. 실패.

2023년도 수능기출!

김익상, 나석주 보이지?
의열단에 대한 설명 골라보자.

1번 : 정미의병 내용.
2번 : 신한청년단 내용.
3번 : 독립의군부 내용.
4번 : 한국독립군 내용.
5번 : 조선 혁명 선언 활동 지침. 정답!

정답 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