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국내 운동
I. 민족 실력 양성 운동
3·1운동 이후 세계가 조선의 독립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고, 또한 일본의 위세가 하늘로 치솟아 우리 애국 계몽 운동 계열의 조선 지도자들은 당장은 독립이 어렵겠다 생각하여 훗날을 위해 민족의 실력부터 양성하고자 해.
1. 물산 장려 운동
일제가 회사령 철폐 → 무관세 정책 → 일본 침투 가속 → 조선인들의 대항
문화통치가 시작되어 저번 시간에 말한 회사령을 철폐한단다.
총독의 허가 없이도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거지.
이제 꼭 총독에게 샤바샤바하는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기업을 운영할 수 있어!
따라서 조선인들의 회사가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해.
근데 문제는 1923년에 일제가 무관세 정책을 펼친다는 거야.
이게 뭐냐면.... 원래 일본 물건이 조선에 들어갈 때 세금을 내야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일본신발이 더 비싸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선신발을 더 사게 되겠지?
근데 만약 무관세가 되서 위 그림의 15원이 빠져버린다면 일본의 물건이 더 싸네?
그럼 조선신발 망하는 거야...
일본 놈들이 세금 걱정하지 않고 조선에서 마음껏 물건을 파는 거지...
조선 장사꾼들 죄다 망하기 직전의 상황이 온 거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조선인들은 일본의 못된 정책에 맞서 대항을 해.
그래서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 운동가들은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워 국산품 장려와 근검절약으로 민족 기업을 육성하고, 민족 자립경제를 이룩하고자 하여 1920년 9월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함.<★>
또한 양말, 메리야스, 고무신 등의 공장, 금주 및 단연(담배 끊기)회, 경성 자작회(학생단체)를 설립하여 각 단체대표들은 뭉쳐서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해.
이들은 산업장려, 국산품 애용, 경제적 지도 등의 활동 방침을 수립하고, 전국에 분회 설치하여 대중적 계몽 운동을 전개한단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자본가와 상인만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비판을 받았고, 정책적인 뒷받침이 없었으며, 재정 또한 부실해서 결국 물산장려운동은 망함 ㅠ
2. 교육과 과학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 운동
(1) 조선 민립 대학 설립운동(1922)
산업만 장려하느냐? 아니지....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야!
국가 내에 똑똑한 인재가 많아지면 그만큼 국가가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
근데 이를 우려한 일본 놈들은 우리 조선인들에게 차별교육을 실시하면서 우민화를 시켜.
우민화가 뭐냐면 백성들을 무식하게 만든다는 거야. 통치하기 쉽게...
따라서 민족지도자들은 1920년에 조선교육회를 설립해.
이들은 학교를 증설, 일본인과 조선인의 교육차별을 폐지, 한국어 교육용어 사용, 한국사 교육 등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교육정책에 대항했어!
투쟁 끝에 결국 일본은 1922년에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인에게 교육에 있어서 일본인과 평등한 대우를 해준단다.
근데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조선인은 기초 교육은 잘 받는데 말이야... 고등교육(대학, 대학원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학교교육의 끝판왕의 맛을 본 전문가들이 양성되지를 않는다고...
그래서 조선교육회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실시해!<★>
일제에게 조선의 대학설립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자, 이상재 현상윤 이승훈 등이 1922년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한사람 당 1원씩 1000만원 모금운동을 시작한단다.<★>
이 운동은 국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해외까지 퍼져나갈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지!
하지만!!! 일본 놈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ㅠㅠ
강연 막고, 기성회 임원들 못살게 구는 등 엄청난 탄압과 방해공작을 해.
그리고 1924년에 일제의 경성제국대학 설립이 되어 큰 방해가 됐고, 모금운동의 부진으로 결국 좌절된단다.
(2) 문맹퇴치 운동
우리 조선의 노력이 여기서 끝난 게 아니지!
학교가 많이 늘어났다고 하여 조선인 모두 학교를 갈 형편은 아니었어.
이에 따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잡지나 신문을 통하여 계몽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조선에는 글을 배우지 못한 까막눈이 겁나 많아 ㅠ
잡지나 신문을 읽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1920년대 후반에는 언론사가 앞장서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1920년대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거든.
조선일보는 29년부터 34년까지 한글교재를 보급하면서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했고, 동아일보는 31년부터 34년까지 브나로드 운동을 해.<★>
브나로드운동이 뭐냐면 농촌계몽운동이야.
농민들은 농사짓기 바쁘고, 농촌의 시설도 후지니까 교육 받을 기회가 없잖아.
그래서 그들을 계몽시켜주는 좋은 운동이지!
● 물산장려 : 무관세정책에 맞서 물산장려운동을 함.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자본가를 위한 운동이라 비판받음.
●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 : 조선교육회.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한 사람당 1원씩 1000만원 모금운동.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고 모금운동이 부진해서 실패.
● 문맹퇴치 운동 : 조선일보(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브나로드운동)
II. 쟁의행위
쟁의행위는 사회주의 진영이 주도했어.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단다. "만국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영향으로 1920년대부터 조선에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져.
가끔 문제가 출제되는데 시기상 3·1운동은 사회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
3·1운동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다느니, 사회주의 영향을 받았다느니 하는 것들은 죄다 오답.
1920년대에 사회주의가 유행하면서 25년도에는 조선공산당이 창립돼. 이제는 노동자들의 조합이 만들어지고 쟁의를 시작하는 거야.
그러다 1929년에 아주 크게 쟁의 사건이 하나 터져.
그게 바로 원산총파업<★>이야. 이로 인하여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된단다.
참고로 원산파업은 일본노동자들도 지원을 해줬단다. 사회주의는 민족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연대를 한 거야.
한편 농촌에서는 소작료인하를 위해 소작농들이 쟁의행위를 했어. 대표적인 게 1923년의 암태도소작쟁의<★>!
그리고 1927년에는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되어 쟁의행위를 조직적으로 했단다.
● 원산파업(1929). 암태도소작쟁의(1923)
III. 청년·소년·여성 운동
1. 소년운동
당시 어린이들은 학교도 못가고 열악한 환경과 낮은 임금을 받으며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는데,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이야.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린이를 한울님(동학의 신앙대상)처럼 대하라고 했거든.
1921년에 동학의 뒤를 이은 천도교의 청년신도들이 방정환을 중심으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해.
1922년 천도교 소년회는 5월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행사를 갖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발간했으며 일본에서 어린이 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설립한단다.
또한 1922년 조철호가 창설한 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인 조선소년군과 정성채가 창설한 조선소년척후대 등이 소년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기억해.
2. 여성운동
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여성운동이 전개돼.
당시 여성은 재산의 소유권과 처분권을 가질 수 없었고, 재산 상속과 친권행사도 차별받았단다.
또한 취업할 때도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했고 여성노동자들의 노동 조건도 남자에 비해 열악;
이렇게 일제시대에는 여성차별이 법제화 되어있었어.
법에 여성을 차별하는 규정이 있었다는 거야.
여성운동이 활발해진 시기는 3·1운동 이후야.
1920년대 초 여성운동은 종교계 여성단체가 주도하여 계몽운동차원에서 전개됐어.
문맹퇴치와 생활개선교육은 물론이고, 가부장제도 및 여성은 가사노동과 양육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봉건적 인습을 타파하는데 집중했지!
하지만 1924년에는 이런 계몽적 여성교육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적 여성 해방론을 주장하면서 최초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가 탄생하여 강연을 활발히 열었단다.
1927년에는 여성운동 조직이 커져서 기독교계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협동전선을 공고히 하여 근우회<★>를 조직해.
근우회는 신간회와 자매관계를 맺고 조선 여성의 대동단결을 꾀하지.
● 천도교 소년회(방정환, 어린이날). 근우회.
IV. 형평운동
1. 신분제의 폐지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분 및 계급이 어떻게 없어졌을까?
서양문물과 사상이 들어오면서 신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해.
타고난 핏줄이 아닌 능력을 우선시 하는 사회가 도래하는 거지.
2. 형평운동(1923)
갑오개혁 때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완전 폐지되고 박성춘의 연설도 있었으나, 여전히 사회에는 신분 차별이 존재했어.
이때 당시에 이력서나 입학원서에 신분을 기재하게 하는 등으로 의도적으로 신분차별을 유지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에 반발하여 1923년 백정들이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조직해.<★★>
이들이 한 운동을 형평운동<★>이라고 하는데, 이게 전국적으로 확산이 됐단다.
모욕적인 칭호폐지, 교육을 장려, 계급을 타파 하는 등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전개됐어.
● 형평운동 : 백정. 진주. 조선형평사.
V. 6·10 만세운동(1926)
민립대학설립이 좌절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의 해외단체들의 독립운동도 퇴조하였으며, 조선인끼리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로 나뉘어 서로 대립을 해.
계속 이렇게 실패만 거듭하고 서로 싸우면 독립을 쟁취할 수가 없겠지?
때마침 1926년 4월 조선의 왕 순종이 승하를 한단다.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순종의 인산일<★★>에 천도교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협력<★>하여 3·1운동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을 계획했어.
'우리 교육은 우리 손으로', '일본 제국주의 타파', '토지는 농민에게 돌려라', '노동은 하루에 8시간만!' 의 내용을 담은 격문 10만부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준비했는데...
3·1 운동 때 고생했던 일본 놈들이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소냐;
일본의 철저한 감시 하에 결국 준비과정에 사회주의자들이 발각되었어. 하지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그대로 밀어붙여서 경성(서울) 시내 곳곳에서 격문을 살포하며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단다.
이것이 바로 1926년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이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운동을 진행하니 이에 감동한 시민들도 합세했지.
경성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의 학생들도 동맹 휴학을 감행하면서 6·10만세운동에 참여했어.
6·10만세운동이 지방 곳곳으로 퍼져나가긴 했지만, 일본이 기마경찰까지 동원하여 수많은 학생들을 체포하고, 치안유지법 등에 의한 강력한 탄압으로 인하여 3·1운동 수준의 대규모 전국시위로 확산되지는 못했음;
그러나 6·10만세운동은 학생운동위상을 보여줬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서 후에 민족유일당 결성의 계기가 된단다.
● 순종인산일. 민족주의+사회주의. 준비과정에서 일본에게 발각됨. 학생들이 주도한 대규모 만세 시위.
VI. 신간회(1927)
중국의 국공합작에 영향을 받아서 비타협적민족주의 계열과 치안유지법으로 탄압을 받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1926년 조선민흥회를 창립하였고, 또한 6·10만세운동이 계기가 되어 정우회는 정우회선언을 통해 민족주의 세력과 손을 잡을 것을 주장<★★>하는 등 두 진영간의 제휴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었어.
여기서 잠깐!
비타협적민족주의는 무엇이냐 하면...
민족주의 계열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자고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타협적민족주의(자치론)와 식민지배 인정 같은 개소리하지 말라는 비타협적민족주의로 나뉘어.
타협적 민족주의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자치론을 내용으로 한 '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을 쓰면서 큰 물의를 빚은 바가 있거든.
친일파나 마찬가지지;
이에 맞선 자들이 비타협적민족주의자야.
암튼 1927년 2월에는 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진영이 합친 신간회가 탄생!!<★★>
신간회는 전국 140여개 지회를 비롯해 해외에도 지회가 있었고, 회원 수가 거의 4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조직이 어마어마했어.
이들은 3대강령(정치적 각성 촉구,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 일체 부인)을 채택<★>하고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을 했지.
또한 원산노동자총파업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진상조사단 파견하고 민중대회 열어서 확산시도)<★★>, 그리고 근우회와 자매단체를 맺어 곳곳의 항일투쟁을 지원했단다.
신간회가 6.10만세운동은 지원하지 못했다는 것 기억해둬. 이거 시험에 종종 나와.
6.10만세운동이 신간회 탄생 전의 일이라서 당연히 지원 못하지ㅋ
일제는 신간회가 점점 커가니까 두렵겠지?
따라서 민중대회사건을 계기로 간부들을 전원 체포 투옥해.
게다가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코민테른에서 노선이 전환되어(걍 해외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또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고 이해하면 돼)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연대를 파기하고 신간회 해소(해체X)를 주장한단다.<★>
"해소라니!! 무슨 소리인가 이 사람들아!!! 지금은 뭉쳐야할 때요!!"
이런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여 신간회는 나락으로...
● 배경 : 비타협적민족주의+사회주의. 정우회선언.
● 3대강령(정치적 각성 촉구·단결을 공고히 함·기회주의 일체부정) 채택. 원산노동자총파업, 광주학생항일운동(진상조사단·민중대회), 근우회 등 곳곳의 항일투쟁 지원. 6·10만세운동 지원하지 못함.
● 신간회 해소.
VII.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
1920년대에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조선인 학생들이 많아지긴 했는데, 일본 놈들이 겁나 차별을 해.
일본 학생이 큰 잘못을 저질러도 봐주는 반면, 조선 학생은 조금만 잘못해도 줘 패고 모욕하고 퇴학시켜버리는 등 개같은 경우가 많았다고...
이런 분위기 속에 조선 학생들의 분노는 점점 게이지가 차 올라가.
그러다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터져!!
1929년<★> 10월 30일 전남 광주의 통학 기차 안에서 일본 남학생들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이 발생해.<★>
이를 보고 있던 조선 남학생들이 분개하여 일본 학생들을 끌고 가서 패싸움을 벌였어.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사한테 잡혀 들어갔는데, 이 쉐키들이 일본학생은 가볍게, 조선학생은 무겁게 차별적으로 처벌하는 거야.<★>
그리고 이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돼.
이걸 본 조선학생들이 빡이 치겠냐 안치겠냐?
당연히 죄다 눈돌아가는 거지...
이에 광주 지역의 학생들이 총 연대하여 시위를 벌여!!!<★>
걍 만세 시위 뿐 만이 아니라 실력행사도 했어.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를 습격하여 원숭이놈들 다 두들겨 패버릴 계획까지 했단다.
중학교 습격은 경찰이 철통방어를 해서 성공은 못했지만, 길거리 행진을 하며 일본인 순사 및 역원, 그리고 길가는 일본 중학생들을 줘 패는 등 아주 살벌한 운동이었어 ㅋㅋ
지금 주먹 꽤나 쓰는 짱이나 일진들은 같은 학우들 괴롭힐 생각만 하지?
일제시대의 주먹 잘 쓰는 학생들은 못된 일본 놈들로부터 친구들을 보호해 주는 겁나 의로운 청소년들이었다고...
나름 협객이었지!
암튼 이런 학생운동은 광주에서 전국 학교로 퍼져나갔고, 신간회의 지원에 힘입어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주장했으며, 더 나아가 식민통치 자체를 부정하는 항일 투쟁으로 발전한단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0년대 최대 규모 항일민족운동<★>으로서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사건이야.
(20년대 최대 규모 항일민족운동은 6·10만세운동이 아니라 광주학생항일운동임! 헷갈리면 안돼.)
● 조선학생의 차별대우. 전국으로 확산. 1920년대 최대규모항일민족운동.
2022 수능기출!
난 1927년 보자마자 신간회 눈치챔.
꼭 연도 외우지 않아도 돼.
근데 외우면 문제 푸는 능력 쌉 강해짐.
신간회의 3대 강령이랑 진상 조사단 보이니?
신간회 골라보자.
1번 : 국채보상기성회에 대한 내용.
2번 : 정우회 선언 계기로 결성. 정답!
3번 : 을미의병에 관한 얘기.
4번 : 조선건국동맹에 대한 내용.
5번 : 독립협회에 대한 내용.
정답 : 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