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국외 운동
I. 1910년대 초·중반 국외활동
한일합방이 된 후 만주와 연해주, 미주 등 국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돼.
민족지도자들이 만든 한인집단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가 생기지.
1. 서간도
애국계몽운동 때 설명했던대로 신민회<★>는 이회영을 서간도로 파견하여 독립운동기지를 지을 곳을 물색해.
삼원보 지방이 채택되었고, 신민회 간부들은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주시켜서 한인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설립하지.
황무지부터 개간한 후에 병농제를 원칙으로 이주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신흥강습소를 건설해서 조선인에게 민족교육과 군사교육을 했어.
학술을 연마하고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하며 교육사업이 확대되어 나가자 조선에서 많은 애국 청년들이 몰려와 빛을 발한단다.
하지만 1912년에 서리가 내려 농사를 다 망치고 말아; 이듬해에도 마찬가지...
결국 운영난에 부딪혀 경학사는 해체ㅠㅠ
하지만! 부민단이란 단체가 그 사업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준비한단다.
이 부민단은 1919년 3.1운동 이후 한족회로 개편하고, 드디어 서간도에 '서로군정서'라는 군사기관이 탄생을 하지.
서로군정서는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의 명맥을 이어받음)를 세워 독립군들을 양성하였고, 훗날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활동을 해나가.
2. 북간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상설과 이동녕 등은 만주로 이주하여 1906년에 한인들이 모여 사는 용정촌에 자리 잡아.
그리고 수학·헌법·정치학·역사·지리 등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하는 서전서숙을 설립하지.
하지만 1년 만에 폐교되고.... 그 명맥을 이어받아 1908년에 명동촌에 명동학교가 탄생하여 독립군을 양성한단다.
한편 1911년에는 만주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모아서 지린성에 중광단을 조직해.
처음에는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항일민족교육 등 정신교육에 치중을 하지만 3·1운동 후에 대한정의단으로 개편하고,
김좌진이 들어오면서 군정부를 거쳐 조직을 확대하여 북로군정서(1919.8)가 탄생하지.
또 이때 즈음하여 홍범도 장군이 조직한 대한독립군도 북간도에서 조직되어 대한국민회(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만든 최대규모의 항일비밀결사)의 소속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했어.
3. 러시아 연해주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역시 한인들의 거주지가 탄생해.
이름하야 신한촌!
이상설·이동휘 등은 1910년에 한일합병이 되자 성명회를 조직하였고, 이들은 각국 정부에 합병무효를 알리는 등으로 일제에 저항을 했어.
그리고 1911년에 이 신한촌에 본부를 둔 권업회를 창설한단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창간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교민을 단결시켰으며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지.
1914년에는 이상설을 초대 의장으로 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14년 8월에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고, 일본과 동맹국인 러시아는 권업회를 해산시켜.
이에 따라 대한광복군정부도 역시 해체되지...
하지만 세계1차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에 대한국민의회가 창설되어 광복군 정부의 명맥을 이어간단다.
4. 기타지역
미주지역에는 전명운·장인환의 스티븐스 사살사건계기로 1910년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에서는 대조선 국민군단이 조직되어 많은 일을 한단다.
한편 중국 상하이에서는 1918년에 신한청년단이 조직되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등 다양한 외교활동을 해.
● 서간도 : 부민단.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 북간도 : 북로군정서
● 연해주 : 신한촌. 권업회.
● 대한인국민회-미주지역. 대조선국민군단-하와이. 신한청년단-상하이,김규식,파리강화회의 파견
II. 임시정부의 탄생
1. 정부의 수립
3·1운동 일어났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이 뭐였는지 알아?
각 도시가 개인플레이를 했다는 점이야.
이 위대한 운동을 총지휘 할 지도부가 없었다는 거지.
따라서 이를 계기로 사령부가 등장해.
근데 하나만 생긴 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생겼어.
하지만 대부분은 창립 선언만 하고 제대로 활동한 곳이 없었으므로 3곳만 기억하면 돼.
연해주에서는 손병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에서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성(서울)에서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는 한성정부!
독립운동을 총 지휘하는 지도부가 따로따로 놀면 당연히 안 되겠지? 그래서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돼.
뜨거운 논의 끝에 결국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로 통일이 된단다.
왜 상하이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로 뭉쳤느냐?
어디로 뭉칠까 논의할 때 그 노선이 '독립전쟁 vs 외교활동' 이렇게 대립을 했거든.
독립전쟁을 선택 한다면 간도나 연해주로 가는 거고, 외교활동을 선택한다면 서구 열강의 외교공관이 몰려있는 상하이로 가는 거야.
근데 이 시기에 파리강화회의가 열려.
우리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라고!!
따라서 결국 외교활동으로 밀어붙이기로 결정하여 상하이에 자리 잡은 거지.
위치는 상하이로 뭉치긴 했지만, 각료구성 등의 법통성은 한성정부의 것을 계승했어.
한성정부는 13도 대표회의와 국민대회를 통하여 결성되었거든. 국민적 절차를 거쳤다는 점에서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렇게 하여 1919년 4월에 임시정부는 1차 개헌을 하며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을 국무총리로 해서 민주공화제와 삼권분립을 내용으로 한 헌법 공포를 통하여 우리나라 최초 민주 공화정제 정부 출현!
2. 활동시기의 구분
임시정부의 활동시기를 근거지별로 나누어 봤을 때 크게 상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38), 중경시대(1939~1945)로 나뉘어져.
일제의 압박·민족의 분열 등으로 위태로운 시기가 있었지만, 모든 시련을 버텨내고 광복시까지 살아남아 끝까지 투쟁을 한단다.
활동에 대해서는 1920년대 독립운동(국외)편에서 설명을 이어가도록 할게.
● 대한국민의회·대한민국임시정부·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법통성은 한성정부의 것을 채택). 이승만 대통령. 민주공화제. 삼권분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