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운동

I. 발생배경
항일 의병 운동의 사상적 뿌리는 위정척사사상이야.
외세를 물리치고 우리 것을 지키자!!!!
성리학 매니아들이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반대하면서 시작된 것이라, 공화정이 아닌 왕의 권한을 다시 바로 잡겠다는 복벽주의 성향이 강해.
원래는 19세기에 천주교를 상대로 투쟁하다가 2번의 양요와 강화도조약을 겪으면서 서양열강과 일본으로 대상이 바뀐단다.

상소도 올리고 집회도 열며 평화적으로 나가다가 그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자 이제는 의병을 일으켜 무기를 들고 무력투쟁을 전개해.
이들은 충군사상과 항일구국투쟁의 성격을 나타낸단다.
의병활동은 크게 총 3가지 시기로 구분돼.
을미년, 을사년, 정미년!

II. 을미의병(1895)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친일 개화파가 집권을 했으며 을미변복령과 단발령이 발표되자 유생들의 눈이 돌아가.<★★★>
명성황후의 복수를 하겠다며 유생들은 동학농민운동 후 남은 세력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대규모 항일 투쟁을 시작한단다.

근데 을미의병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음.
이들의 중심인 유생들이 누구야? 양반들이잖아.
민중들과 합심이 됐겠어?
심지어 유인석은 승전을 거두고 있는 선봉장 김백선이 양반에게 건방지다는 이유로 처형을 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단다;

내부에서 신분차별이 있었기에 단결에 한계가 있었고, 이는 전력 약화를 초래했지.
그래도 목적은 같았기에 활동을 어찌어찌 전개해 나가긴 해.
이들은 주로 친일파와 일본인을 처단하고 지방 관청을 공격한단다.
그러다가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힘을 잃고 단발령이 철회됐으며, 슬슬 관군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고종의 해산권고가 내려지자 대부분 해산돼.

●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

III. 을사의병(1905)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조병세가 자결하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사설로 실리자 온 백성이 분노했어.
결국 조약의 파기와 친일파들을 숙청하자며 전국적으로 을사의병이 일어나.
민종식 부대는 홍주성을 점령할 정도로 일본과 치열하게 싸웠는데 결국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함.
전라북도에서는 그 유명한 최익현이 을사5적을 죽이자며 유생들 대표로 의병을 일으켜서 항쟁했어.

근데 최익현은 진위대랑 맞서게 됐는데, 우리 조선 군대인 관군과는 싸울 수 없다고 하면서 순순히 잡혀가...ㅡ.ㅡ
관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 갇힌 상태에서 왜적이 주는 밥은 먹지 않겠다면서 스스로 굶어죽는단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을사의병에서는 평민 대장이 나타나. 신돌석!
평민이 기를 펴지 못했던 을미의병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지?

을사의병은 더 이상 유생들만이 주도한 항쟁이 아니라, 구국정신 하나로 뭉쳐졌기에 많은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끈단다.
이들은 을미의병보다 훨씬 더 강한 전력으로 일본과 맞붙었지만, 일본 군대에 비하여 무기와 훈련도가 부족하여 일본과의 화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로 돌아가ㅠ


● 을사늑약에 반발. 신돌석(평민대장).

IV. 정미의병(1907)
1907년에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됐잖아? 이 군인들 다 어디로 갔을까?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군대 강제해산에 항거하여 목숨을 끊자, 이를 들은 군인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일제에 맞서 의병이 돼.
즉, 의병들은 이제 더 이상 찌질한 민중 봉기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군대가 된 거지.
훈련을 제대로 받은 군인들이 함께 하니 화력이 열라 강해졌다고 ㅋㅋ

이에 따라 정미의병은 의병전쟁화....즉 강력한 대일 항전으로 발전해.
참고로 이때는 양반 유생들이 구성원의 24%밖에 안됐어. 한마디로 평민들이 주를 이뤘지.
정미의병은 여기저기서 일어난 전국 의병들을 연합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만명 규모의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1908년에 서울 진공 작전까지 펼치려고 했어.<★★>
하지만 참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유생들이 평민대장들을 배척하는 바람에 신돌석·홍범도 등의 부대가 제외되고,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부대에서 이탈해 ㅡ.ㅡ
이렇게 군대가 엉망이 되자 결국 정보가 새어나가;
그리고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실패...
원래 정미의병은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서양 열강들에게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여 의병차원을 벗어나 '대한제국 VS 일본' 형태로 전쟁을 하려고 했는데... 결말이 안타깝지;

정미의병 이후 1909년에는 의병운동이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의병들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계속 투쟁을 하여 호남의병으로 이어져.
일본은 의병들이 열라 세지니까 위기의식을 느끼고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쳐서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등 겁나 학살을 했단다 ㅠ
이로 인하여 전라도일대가 약탈·방화·살육으로 쑥대밭이 됐어;
이 지랄 같은 남한대토벌작전 때문에 2개월 동안 수 천 명이 넘는 의병들이 원숭이놈들에게 체포 및 학살당했지...
결국 우리 의병들은 일제를 피해 간도와 연해주로 나가서 활동을 해. 이들이 나중에 항일무장투쟁세력으로 연결된단다.
<체포된 의병장들>

● 군대해산에 반발. 의병이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군대가 됨. 서울진공작전(이인영,13도 창의군,일본선제공격으로 실패).
● 남한대토벌작전.

V. 의열항쟁
남한대토벌작전에 그냥 당하고만 있을세라... 이때 일본 놈들과 매국노에 대한 처단도 활발히 일어나.
의병항쟁이 집단적 항쟁이라면 의열항쟁은 개별적 저항이지.
이들은 나철·오기호 등이 을사 5적을 처단하겠다면서 암살단을 조직,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1차 한일협약 때 외교고문, 일본 앞잡이 양키) 저격, 이재명의 이완용 피습사건(실패),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등으로 일본 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어.
이 분들의 희생은 비록 나중에 설명할 식민통치를 막지는 못했지만, 일본에게 저항의식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훗날 독립운동가들의 큰 귀감이 됐단다.

<안중근>

● 스티븐스 저격(장인환·전명운). 이토히로부미 처단(안중근)

2020년 수능기출!

역사적 사실을 시간 순서대로 잘 파악하고 있는지 묻는 문제야.
한일의정서는 1904년.
정미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은 1908년.
주요 사건들 연도를 외우면 훌륭하고, 외우기 싫다면 순서와 흐름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돼.

1번 :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번 : 을사늑약은 1905년. 정답!
3번 :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4번 : 노비안검법 고려.
5번 : 훈련도감 조선 후기.

정답 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