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I.배경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전후로 개화 지식인들은 개화에서 국권회복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펼쳐.
그들의 사상적 배경은 서구사회의 진화론이야.
진화론이 뭐야? 적자생존... 즉 약한 자는 다 죽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이잖아.

따라서 우리 조선도 진화하여 강해져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국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당장 회복하기는 어렵고, 우선 실력부터 키워서 강해지자는 목표로 실력양성운동을 펼치는 거야.
애국계몽운동은 한마디로 의병활동처럼 무기를 들어 즉시 국권을 되찾자는 운동이 아니고, 장기적인 싸움을 계획하는 거란다.


● 애국계몽운동. 실력양성운동.

II. 활동
1. 교육
뭐든지 일을 할 때 대중의 힘이 뒷받침이 되어 줘야 큰 파워가 생겨. 근데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무지했어...
백성들의 권리가 어쩌고저쩌고 해봤자, 그들은 "권리?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귀찮으니까 저리 가슈~ 난 농사나 지을 라네" 이랬다고 ㅋ
백성들의 무지는 무관심으로 이어지니... 아무리 정변을 일으키고 개혁을 하려고 해도 흐지부지 되는 거야.
그래서 애국계몽가들은 백성들을 계몽시키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둬.
교육을 장려했다는거지.

백성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하여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개화사상을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는 거야.
그래서 안창호의 청년학우회가 창설되고,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역사 언어 등을 가르치며 백성들에게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어.
전국에 무려 2200개가 넘는 사립학교가 설립될 정도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 부족으로 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해.

2. 산업 장려
교육 뿐만 아니라 산업을 장려하기도 했어. 식산흥업!
학교에 나오려면 우선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야.
일본 놈들이 우리 경제피를 쭉쭉 빨아먹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대항하여 회사를 설립하고 민족 자본을 모으는 등으로 해서 조선 백성들의 주머니를 지켰지.

3. 언론 활동
학교를 세워도 모든 백성들이 다 입학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장사도 해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니 각자 바빴고, 지금처럼 모든 국민들을 입학시킬 만한 시설도 없었고....
그래서 언론을 통해 계몽을 전개했어.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자들은 신문이나 잡지라도 보면서 눈이 트이는 거지ㅋ
이러자 일본은 보안법, 신문법 등을 제정하여 문화운동마저 탄압을 해;

4. 노선의 변동
애국 계몽 운동은 맨날 계몽만하다가 생각을 바꿔.
1907년 경부터 실력양성과 자주독립, 이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하였는데, 어디에 더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성격이 갈려.

실력양성 - 서양의 자유 평등 민권사상에 관심. 서양식 근대 국민 국가 수립 목표. 항일의병운동에 부정적인 시각

자주독립 - 유교를 계승.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큼. 민족주의 사상 전파. 일제 탄압 피해서 지하운동. 1910년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서 무장독립운동.

● 교육. 산업장려. 언론활동. 노선의 변동.

III. 알아야 할 애국계몽단체
1. 보안회 (1904)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황무지개간권을 얻고자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해.

일본 : 야 대한제국아~ 니네 여기 땅 안 쓰지? 저기도 안 쓰지? 니네들이 안 쓰는 땅은 우리가 좀 쓸게! ㅇㅋ?
대한제국​ 정부: 아... 흠.... (고민 고민;)
유생 및 관리들 : 야 이 원숭이놈들아! 뭐라고 씨부리냐? 황무지 개간권!? 절대 안 된다!!!!

이렇게 반대하는데도 일본이 물러서지 않자, 더욱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송수만·심상진 등의 인물들이 보안회를 결성해.
보안회는 민중회의를 열면서 전국적으로 지지를 받아.
'일본 VS 보안회'의 대결은 점점 치열해져갔고 결국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황무지개간권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확실히 선언을 하지!
보안회가 결국 황무지개간권이 일본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데 성공한 거야!<★​★​★​>
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보안회는 해체(1905)되고, 훗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08년에 개간권을 가져간단다ㅡㅜ
결국 황무지개간권이 넘어가긴 했지만, 보안회는 투쟁을 하여 4년이나 미루는 성과를 거뒀어.

2. 헌정연구회 (1905)
보안회가 해산된 후 독립협회 출신 인사들이 발족한 단체인 헌정연구회가 황실과 정부도 헌법과 법률을 지켜야 하고, 국민에게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면서 입헌정치체제 주장해.
이런 근대 민주정치 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면서 계몽운동을 하지.
또한 친일파인 일진회에 대항하였고, 을사조약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결국 일본 강요로 해체되고 말아.(1906)

3. 대한자강회(1906)
헌정연구회를 계승한 단체야.
문제 보기에 자강 자강 이러면 대한자강회라고 생각하면 돼.
일본의 압박으로 헌정연구회가 해체되니까 그 구성원들이 다시 또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대한자강회를 만들어서 활동하는 거지.
이번에는 전국에 25개의 지부를 둘 정도로 큰 규모의 단체였단다.
주로 민중에게 강연을 개최하고 대한자강회월보를 발행했어.

또한 의무교육실시, 사범학교 설립, 조혼 금지 등의 건의안을 제출하는 등 애국계몽 및 민중의 권익을 위해 힘썼지.
처음에는 일본이 정한 합법적인 틀 내에서만 활동했고, 일본인 고문까지 두고 있기에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노선을 좀 파이팅 하게 바꿔.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면서 적극적인 현실참여 운동을 하고, 고종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에 강력히 반대<​★​>하는 등...
그러자 시민들을 선동했다며 일본이 보안법을 적용하여 해체시킨 단다.(1907)

4. 대한협회(1907)
해체된 대한자강회를 재정비하여 설립된 단체야.
국가의 부강, 교육과 산업을 발달을 추구하며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목적으로 계몽운동을 해.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진회와 손을 잡고 이토 히로부미를 극찬할 정도로 친일적 색채를 띄는 짓을 한단다ㅠ
마지막에는 각성하여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를 공격하긴 했으나 별로 힘을 쓰지 못하고 합방된 후에 해체.... (1910)

이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후반에는 애국계몽운동단체가 많아져서 호남학회 · 청년학우회 등 여러 단체가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기억해!

5. 신민회 (1907)
애국계몽운동 하면 신민회를 빠뜨릴 수 없지. 겁나 중요한 단체임!
안창호라는 청년이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1907년에 공화정에 입각한 독립국가를 수립하고자 양기탁과 손을 잡고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였어.
왜 비밀리로 하냐면... 국내 회원과 국외 회원이 서로 연락한다는 규칙이 핵심인데, 이 규칙 때문에 어차피 허가가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야.
도산 안창호 선생님 알지? 지금 현재도 그가 세운 흥사단이라는 단체가 우리 사회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잖아.
암튼 애국계몽운동하면 안창호의 신민회 꼭 기억해야 함.

이들은 평안도·황해도의 기독교 신자들이 주를 이루었고,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정 자유독립국을 세운다는 것이야!! 반드시 기억해야 돼!!
갑오개혁 때까지는 왕권을 제한하는 정도였고, 점점 강력한 왕권에 반대하다가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주장해.
그 주장이 이어져서 대한자강회까지만 해도 입헌군주제였는데, 신민회 이후로는 이제 공화정!!
신민회는 4대 강령을 내걸었어.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이 800여 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고 여러 활동을 했단다.
(1)교육 : 논과 밭을 팔아 돈을 마련한 민중들에게 자금을 지원 받아서 국권회복운동 민족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보창·오산·대성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설립해.<★​★★​> 특히 소규모의 소학교가 아닌 중학교를 세워서 주위 학교의 모범이 되었으며 학생들에게 고급 지식을 습득시켰단다.

(2)강연 및 출판운동 : 강연을 활발히 열어서 애국주의·국권회복·구습타파·민족단합의식 등을 민중들에게 고취시켰어. 또한 '대한매일신보'와 잡지 '소년'으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민중들에게 국권회복의식을 심어줬지.

(3)민족 산업육성 : 태극서관<★​>·평양자기회사 등을 설립하여 일본 자본에 대항해. 하지만 그 자본력이 매우 취약하여 그닥 성과를 내지 못함 ㅠ

(4)독립군 양성 :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지원하고, 만주에 신흥강습소<★​>(훗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현대적 군사 훈련을 실시!

일본 입장에서는 신민회의 활동이 매우 두렵겠지? 당연한 거야...
그래서 1909년을 전후로 조낸 탄압을 가해.
이로 인하여 이제 국내에서는 도저히 활동을 못하겠는 거야.
1910년 합방 후 운동방향을 앞으로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회의를 하는데 크게 두 가지로 갈려.

'무장독립운동(이동휘) VS 교육 및 산업진흥(안창호)'
결국 독립전쟁론에 의견이 모였고 이동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신민회는 앞으로 애국계몽과 함께 독립운동을 할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키고 비밀리에 자금을 확보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단다.

이회영 등의 인물이 국외독립운동기지를 계획하여 마침내 신흥강습소가 서간도에 세워지는 등의 성과를 올려.
이게 중요한거야.
원래 애국계몽운동과 무장독립운동은 서로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민회는 이를 함께 엮어 같이 진행을 했다는 거지.
한편 안창호는 끝까지 민족성부터 개량해야겠다고 하여 미국으로 가서 흥사단을 창립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한단다.

이렇게 만주로 옮겨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신민회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에는 해체돼(1911).
105인 사건이 뭐냐면...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고 계획을 꾸몄다면서 민족운동지도자들에게 누명을 씌워서 600여명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윤치호, 양기탁 등의 105인을 구속시킨 사건이야.
신민회는 비록 사라졌지만, 훗날의 독립전쟁에 밑거름이 되었고 그 회원들은 해체 후에도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꾸준히 이어나간단다.

● 보안회 : 황무지개간권.
● 헌정연구회 : 입헌정치체제. 일진회에 대항. 을사늑약 반대.
● 대한자강회 : 대한자강회월보 발간. 국채보상운동지원. 고종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에 반대. 보안법으로 해체(1907)
● 대한협회 : 친일. 마지막에는 일진회를 공격하다가 해체(1910)
● 신민회 : 1907. 공화정. 안창호. 양기탁. 비밀조직. 국내외 회원들과 연락. 4대강령. 규모가 큼. 교육(오산학교,대성학교,중학교). 강연 및 출판(대한매일신보,소년). 민족산업육성(태극서관,평양자기회사). 독립군양성(신흥강습소). 무장독립전쟁론(이동휘)으로 의견이 모임. 105인사건으로 해체(1911).

- O·X 퀴즈 -

1. 애국계몽운동은 장기적인 계획을 가진 운동이다. (O,X)
2.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식산흥업 등에 힘을 쏟았다. (O,X)
3. 헌정연구회는 일진회에 대항하고, 을사조약에 반대하였다. (O,X)
4.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주장에 대항하였다. (O,X)
5. 대한자강회는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에 반대하였다. (O,X)
6. 대한자강회는 대한협회를 재정비하여 설립되었다. (O,X)
7. 대한협회는 보안법이 적용되어 해체되었다. (O,X)
8. 안창호는 양기탁과 함께 공개적으로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O,X)
9. 신민회는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O,X)
10. 신민회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해체됐다. (O,X)

정답 : O O O O O , X X X O O


​<해설>

6. 대한협회가 대한자강회를 계승함.
7. 대한자강회가 보안법 적용 받음.
8. 비밀리에 조직함.

2022년 수능기출!

삼원보에 신흥강습소를 세웠대.
신민회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자.

1번 :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정답!
2번 : 을미의병에 대한 내용.
3번 : 원산 총파업은 일제강점기.
4번 :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 정부.
5번 : 어린이날은 천도교 소년회.

정답 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