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대외관계
I.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조선 후기에는 우리가 교린 했던 여진족이 성장해서 힘이 겁나 세져!
그들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나라에게 도전장을 던진단다.
두 나라의 싸움이 시작되자 명나라가 상대가 안돼;
후금한테 완전 쳐발리는 거야 ㅋㅋ
이때 명나라가 조선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어.
생각해봐.
만약에 조선이 명나라가 깨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줬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하여 같이 후금을 물리치면 다행이지.
하지만 이 후금이 겁나 강해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괜히 도와줬다가 후금한테 밉보이면 그 다음 상대는 우리 조선이 될 것은 당연한 거지;
그래서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에게 명나라를 도와주는 척 하다가 후금에게 투항을 하라는 비밀스러운 명을 내려서 중립외교를 펼쳐.
하지만 사대주의에 찌든 신하(서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단다.
안 그래도 대동법 시행 등으로 불만이 가득 찬 서인들은 광해군을 폐위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어.
서인은 기회를 보고 있다가 결국 광해군이 자신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태워 죽인 것을 문제 삼아 인조를 앞세워 반정을 일으켜.(인조반정)
결국 광해군은 폐위되고....
문제는 서인들이 친명배금정책을 펼친다는 것이야.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후금을 배척한다!
이러한 조선의 정세를 후금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명나라랑 신나게 싸우고 있는데 조선이 배후를 공격하면 어떡해?
후금 입장에서는 두려운 거지.
먼저 조선을 밟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야.
게다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라는 자가 난을 일으켜.
반란은 진압됐지만 문제는 여기!!
이괄과 함께 반란을 주도했던 한윤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놈이 후금으로 도망가서 광해군 복수를 해달라고 막 부추겼어.
한윤 : 조선에 지금 일이 생겼습니다. 몰락하는 명을 배척하고 떠오르는 샛별 킹왕짱 후금의 편에 섰던 현명한 왕께서 서인들에게 공격받아 폐위 되었습니다.
후금 : 근데?
한윤 : 근데 라뇨~ 서인들이 누굽니까? 명나라 빠돌이들이라구요!! 이대로 두면 후금이 명나라 칠때 반드시 조선이 뒷통수를 후릴 겁니다. 지금 조선은 이순신치트공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별 것도 아닙니다! 걍 쳐들어 가시죠?
후금 : 흠...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가서 조선을 짓밟아주마!
한윤 : 굳굳ㅋㅋ
그래서 후금은 광해군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명나라를 치기 전에 우리 조선을 밟으러 오지.
이 전쟁이 정묘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정묘호란이야.
인조 5년 1627년 3월 1일에 3만명의 군사가 조선으로 쳐들어와.
무방비 상태로 있던 조선군은 쳐발린단다ㅠ
쳐들어 온지 10일 만에 평양성이 함락되자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피신을 해.
재미있는 것은 관군은 완전 박살이 났지만, 역시 우리 조선의 예비군 의병들ㅋㅋ
겁나 싸움을 잘하는거야.
(여담이지만, 인터넷에서 본 글 중에.... 대한민국 도시 한복판에 전차가 서 있으면 거길 지나가는 민간인들 중 그 누군가는 조종할 줄 안다는 사실ㅋ 대한민국이나 조선이나 남자들 거의 다 군인 출신이라 총들면 그대로 용사되는 거지! 조선 의병들 수준 체감이 됨?)
정봉수, 이립 등의 의병한테 겁나 두들겨 맞기 시작하니까 후금은 조선에게 강화를 청해.
여기서 후금은 우리는 형제관계이니 조선한테 배후를 치지 말라고 경고하는 정묘조약을 맺고 철수하지.
그리고 중국 본토로 대군을 몰고 가서 명나라를 침몰시킨단다.
근데 후금은 명나라를 쳐부순 후에 형제맹약이 담긴 정묘조약을 어기고 계속해서 압록강을 넘어와 조선 민가를 약탈하는 거야.
게다가 엄청난 조공을 요구하고 이제는 형제가 아닌 군신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조선은 격분하여 전쟁을 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게 돼.
후금은 조선이 선빵을 날리려고 하니까 미리 이를 차단하고자...
조선에게 왕자를 인질로, 그리고 전쟁하자는 놈들 다 압송하라는 요구를 해.
하지만 조선은 이를 쿨하게 거절~
결국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개명한 후에, 인조 14년 1636년 병자년 12월 1일에 조선에 군대를 끌고 와서 전쟁을 일으켜.
이게 바로 병자호란!<★★>
뭐... 상대가 안됐어.
이번에는 청나라 군대가 10일 만에 한양에 당도했으니 조선 수비군의 상태가 어땠는지는 짐작이 갈 거야.
인조는 또 다시 숭례문을 빠져나가 강화도로 튀려고 했는데....
정묘호란 때의 교훈을 얻은 청나라는 미리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아버려서 이번에는 인조가 도망갈 수도 없었어.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해...
강화도만큼 방어력이 좋지 못한 남한산성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었고...
피신해 있던 인조는 결국 항복하면서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에 찧고 피를 흘리며 청이 요구하는 군신관계 등의 모든 조건을 수락.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단다...
이런 굴욕을 겪은 우리 조선에서는 또 다시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일어나.
효종때는 송시열, 숙종때는 윤후를 중심으로 해서 무기를 사들이고 개발하여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지.
하지만 북벌론은 실행도 하지 못하고 사그라져.
더욱이 어처구니없는 것은 청나라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자, 조선은 지원군을 보내줘...(나선정벌)
이렇게 조선에서는 전쟁은커녕 북학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한단다.
이게 뭐냐면 청나라에서 발전된 문물을 접한 학자들이 그들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야.
실제로 청나라에는 서양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로 인해 과학 기술도 엄청 발전하거든.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슬슬 그들의 힘을 인정하고 동북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단다.
● 광해군의 중립외교(강홍립). 정묘호란. 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 군신관계 수락). 북벌론(흐지부지). 북학운동.
II. 일본과의 관계
일본은 뭐 볼 것 없어.
조선은 임진왜란 후 에도막부와 국교를 재개하면서 큰 변란이 없었고 일본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지.
그저 하나만 기억해! 통신사.
통신사를 통해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파하고 막부의 권위를 인정한 거야. (반면 일본국왕이 보내는 일본국왕사는 조선에 못 들어오게 금지함.)
● 통신사
III. 간도 문제
숙종 때 청나라와 영토분쟁이 발생해.
우리 조선민들이 간도에 엄청 많이 살고 있었거든.
그래서 청과 조선은 조사단을 파견하여 서쪽에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받아.<★>
근데 19세기 후반에 또 이놈들이 간도를 지들 땅이라고 우겨.
나중에 와서 왜 이게 문제가 되냐면, 청나라 놈들이 두만강을 지네 발음으로 토문강으로 불렀다는 거야.
원래 간도 쪽에 토문강이 있었는데도 말이지...
즉 백두산정계비는 두만강이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데 짜장들이 두만강을 경계로 정한 거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거야.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냐;
이렇게 분쟁이 끊이지 않다가 1909년에 종결을 맺어.
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게 넘겨주거든.
청일회담에서 간도는 청나라, 안봉선 철도권은 일본이 갖기로 한단다.
왜 일본이 나서서 이 지랄을 했냐고?
미리 빡침주의....
이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줄게!
● 백두산 정계비 (서쪽에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